이제 "숲속의 숲" 총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된 듯합니다. 처음으로 총서의 아이디어를 냈던 이무영 @commurmuro 의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숲속의 숲" 기획은 이 위에 글로 정리된 이야기를 이무영이 황종욱 @yocla14 에게 이야기하면서 점점 더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무용하고 아름다운 책"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 중에 바로 기욤 드 티렐의 《타유방의 요리서》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리서》였는가? 그 문제는 다른 글을 통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보기로 하지요.
단 한 마디로 "숲속의 숲", 또는 "초기근대잡학총서"라는 기획을 설명해보라, 고 묻는다면('단 한 마디'라는 말이 가슴 아프지만 때로 그런 설명이 요구될 때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유럽이라는 공간적 문맥과 14세기부터 멀리는 18세기까지의 시간적 문맥 속에 존재했던 책들을 통해 '근대(近代)'를 재정의하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하려 합니다. 근대에 대한 재정의는 너무도 많은 이들의 학문적 대상이 되어 왔으니, 오히려 걸리는 것은 '잡학'이라는 단어겠지요. 우리가 이들을 '잡학'이라 부르는 것은 그 책들의 의의를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쉽사리 정의하거나 분절할 수 없었던 것들을 너무 간단하게 유형, 범주화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합니다. 새로운 출발점. 그것이 우리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그 이름은 태초의 혼란, 모두가 이야기하되 누구도 알지 못하는 '근대'라는 미답의 영역에 대한 설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기획의 역설적인 면은, 저희가 번역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작품들이 위치한 시공간적 배경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한없이 과거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 것, 또는 그들을 비로소 발견하게 해준 도구들은 지극히 현대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프랑스 국립도서관이《요리서》를 디지털문서화 해놓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문서에 아이패드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접근할 수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14세기 후반에 쓰여진 양피지 수고본을 만날 수도 없었겠지요. 또한 그 시간적 간극만큼이나 낯선 중세의 프랑스어를 읽고 번역하는 데 있어 세계 여러 대학들이 구축해놓은 중세 프랑스어 코퍼스(corpus)가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정직하게 말해 수많은 문자들의 어지러운 배열에 불과했습니다.
최첨단의 정보처리기술을 통해서 돌아간, 수백년 전의 유럽. 시간 속에 갇혀서 조용히 새로운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있는, 이름없는, 또 후대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우리는 그곳에서 친숙함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 시대가 보기에 또는 친숙한, 또는 특이한 흔적들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정반대 의미의 단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 후대인들이 이 텍스트들로부터 느낀 낯섬과, 그 낯섬이 가져오는 고독을 이기지 못해 애써 부여한 어떤 추인(追認)을 달리 부르는 것에 불과할테니까요. 우리는 그저, 바로 우리 앞의 텍스트가 열어놓은 어느 지점에서부터 "새로운 일방향으로 그어보는 이스토리아"를 시도해보려 합니다. 그것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다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지금 시도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을 따름입니다.
Oxford Camerate가 연주하는, 14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곡가인 기욤 드 마쇼의
"노트르담 미사 La Messe de Nostre Dame" 중 '키리에 Kyri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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